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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역사

2010-03-0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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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0.수요일


미쉬파트


 


 


 


안녕하세요, 미쉬파트입니다. 교회개혁에 대한 연재글을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여섯번째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중간쯤 지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일련의 연재가 끝나도 기회가 된다면 다른 방향에서의 교회개혁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구상했던 부분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의도하고 시작한 연재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계속 마음 속에 두었던 주제들이라 글 쓰는데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사실은 재미있는 것이 아님당...-_-) 제 글에 대한 피드백이 쪽지와 메일로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데 확연히 두 부류로 나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생한다, 열심히 잘 해봐라 하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 그러고도 목사로 살길 바라냐, 동료들에게 칼꽂고 무슨 영화를 보려느냐 하고 준엄(?)하게 꾸짖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메일함과 쪽지함을 열기가 요즘은 좀 무섭기도 합니다... 그래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서 고맙다고 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만... 언젠가 연재가 중단되고 글도 안올라오면 어디로 잡혀간줄 아십쇼...(아, 이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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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근황은 여기까지. 오늘은 말씀드린 대로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먼저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은 제 글은 한국교회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술적인 연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딴지에 오는 분들 가운데 이런데 관심있는 사람 몇명이나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데에는 별 관심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기도 바쁜데 10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알려고 하는 사람들 별로 없겠지요.


 


그래서 제 글은 앞서 썼었던 글들, 즉 한국 개신교회의 현상적 문제들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일정부분 비롯되고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논거로서의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좁혀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날 동네에 피씨방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교회 십자가 숫자만큼 다양한 한국 개신교의 교파와 교단들의 분열의 원인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사실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왜 한국교회들이 미국신학에 종속되어 있는지 그리고 교권주의가 심화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먼저 말씀드릴 것은 개신교의 분열의 역사와 함께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한국근현대사 가운데 정치와 한국교회와의 관계는 추후에 쓰려고 합니다. 특히 6.25 전쟁과 함께 이 땅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반공이데올로기가 한국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사실 지금도 강력하게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주된 세계관이 되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은 개신교의 분열의 역사와는 별도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편 미리 광고하는 것 같습니다만...(ㅎㅎㅎ) 이 내용을 다룰 때 왜 대형교회 목사들이 입만 열면 빨갱이 운운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단체로 미친거 아니라면 왜 다들 그렇게 말하는지 분명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 편 광고 낚시는 이만하고 오늘의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좀 다른 이야기 먼저 하겠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교세와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개신교파가 어디일 것 같습니까? 정답은 침례교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쟝 칼뱅)


 


으응? 하실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에는 침례교회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교세도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지요. 우리나라는 압도적으로 장로교가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합니다. 대형교단은 물론이고 대형교회들도 대부분 장로교에 속해 있습니다. 아 물론 최대교회 가운데 하나인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오순절교 계열의 교파인 순복음교이고 이보다 교회 건물은 더 큰 연세중앙교회 같은 경우는 침례교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인 비율로 봐서는 장로교회의 입지가 타 교회들을 압도합니다.


 


한국교회가 하늘처럼 떠받드는 미국교회의 가장 큰 교세는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나머지 다른 개신교회들을 압도할 정도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의 말대로 한국교회는 칼빈의 후손(-_-;;)들이기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땅에 가장 많은 선교활동을 한 선교사와 교단이 바로 미국의 장로교단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활동을 한 교단이 감리교이구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주요 개신교단이 장로교와 감리교가 된 것입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법입니다. 가장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고 또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교회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교파가 장로교였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주류교파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다른 교파에서도 선교활동을 안한것은 아니지만 장로교파의 활동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오늘 글은 한국 기독교회의 전체 역사가 아닌, 한국 개신교, 그것도 주류인 장로교를 중심으로만 살펴 볼 예정입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나게 긴 분량이 될 것입니다만... 다 쓰기도 싫고 다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이라 중요한 부분만 다루겠습니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통계에 따르면 공식적인 집계에 따른 개신교회의 숫자는 124개 교단에 58000교회 입니다. 물론 이는 공식적인 집계이고 비공식적 통계(등록이 안된 곳)를 감안하면 교회수는 최소한 7만에서 10만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 산하에 등록교단이 124개면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솔직히 목사인 저도 이거 다 모릅니다). 등록 신도 숫자로는 개신교보다 2백만명 이상 많은 불교의 교단이 109개라고 하니 개신교의 어지러운 상황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다 말씀드릴 것은 없고 장로교회만 보면 가장 큰 교단인 예장통합이 약8000교회, 예장 합동은 약 11000교회 정도가 됩니다(물론 정확한 통계는 아닙니다 대략적인 숫자죠). 합치면 예수교 장로회 가운데 가장 큰 두 교단의 교회숫자만 2만 교회 가량 됩니다. 전국의 등록된 개신교회 숫자가 6만이 안되는 상황에서 그 중 1/3이 예장 산하에 있는 두 교단에 몰려 있습니다. 그럼 장로교 전체가 얼마나 많은지는 대충 상상이 가실 겁니다. 여기에 기장(기독교 장로회)와 나머지 예장의 대형교단들(고신이나 대신, 개혁 등)을 다 합치면 장로교회는 나머지 개신교회의 숫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교세가 큽니다. 즉, 한국개신교회는 현재 장로교가 지배적인 종파고 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유는 위에서 밝혔듯이 한국교회 선교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종파가 장로교였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제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개신교회가 오늘날에는 왜 이렇게 난립을 하게 되었는지 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보기에는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는 크게 네번의 분기점을 가졌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1차 성장의 시기로 선교초창기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까지 입니다.


 



1884년에 세워진 소래교회


 


두번째는 일제치하에서의 침체기였던 1910-1945년까지 입니다. 세번째는 광복과 6.25 전쟁이라는 엄청난 혼란기 였던 1945년-1960년까지 입니다. 네번째는 2차 성장기이자 가장 폭발적인 개신교회의 성장이 있었던 1960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상황입니다. 물론 네번째 분기점은 1990년을 기점으로 다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시점으로 또 나눌 수 있겠습니다만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에서 많이 다루고 있으니까 제외시키면 저는 이렇게 네번의 시점 동안에 한국개신교는 분열을 거듭해 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의 시기에 대해서는 굳이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가 기독교 사이트도 아니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는 별 감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사실 이 시기에는 개신교의 분열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구한말때부터 광복전까지는 한국 개신교는 분열할래야 할 이슈도 없었고 일제의 압제로 인해 뭉쳐야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구구절절히 한국 교회의 역사를 다 되짚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서점이나 국회도서관 좀 뒤져보면 한국교회사 역사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좋은 서적들 널려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거기가서 보시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쓰기 귀찮기도 합니다 -_-). 그리고 더 결정적인 이유로는 이 때의 한국개신교는 사실 제가 목사라서가 아니라 꽤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제가 쓰고 있는 일련의 연재글에는 굳이 다룰 필요가 없는 부분입니다.


 


다만 세가지만은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하나는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사회에 근대적인 문물과 학문을 전달하는 긍정적 역할을 했고 한국교회가 자리 잡는데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한 일들이 모두 한국교회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저는 선교사들이 일제 하에서의 선교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제의 탄압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거나 교인들에게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가르쳐 일종의 교회의 비정치화를 형성하려고 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이는 계속적으로 한국교회의 일종의 전통이 되어버려 일제 뿐만 아니라 나중에 다루겠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을 부당하게 탄압한 폭력정권들에 대해서도 침묵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매우 옳지못한 전통을 형성하게 한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분명히 자리매김을 했던 성경 속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라고 보는 바입니다.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의 우경화와 일정부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두번째는 일제시대 황국신민화와 연관된 부분에서 신사참배에 대해 취한 한국교회의 태도가 훗날 한국교회의 분열의 불씨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논쟁이 광복 후에 결국 한국개신교회가 분열을 일으키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 정도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이 근본주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이 성경해석에 있어서 다양성을 상실하고 교조적이고 배타적인 신학관을 형성하게 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상의 세가지 요소는 당시 시대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후대에 심각한 문제들을 유발하게 된 것들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를 갖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한국 개신교의 분열의 주요 원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일제치하의 잔재 청산과정에서의 분열


 


한국사회에서 일제잔재의 청산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한국교회사에서도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제치하에서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교회의 분열을 가속화 시키고 더 나아가 신학적인 분열도 가속화 시킨 촉매가 되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굳이 자세히 말 안해도 다들 아실테고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해 어떠한 대응을 했냐는 것입니다.


 


당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한국교회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죽어도 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가진 보수적 신앙관을 가진 교회들이었고 주로 장로교회쪽이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신사참배는 국가예식이나 의례이기 때문에 이것을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고 가톨릭이나 감리교회등이 이런 편이었습니다.


 


저는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해방 후 큰 후유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제에 협조한 목사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세세한 내용은 다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 부분을 유연하게 처리하려고(회개하고 뉘우치는 사람은 받아주자고) 했던 쪽이 훗날의 기장측이고 이들을 변절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나간쪽이 훗날의 예장입니다. 즉, 장로교의 커다란 양대 교파는 이렇게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히 신사참배문제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입장도 많이 작용했습니다만 그 단초는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차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런 것보다 더 큰 문제가 기장이나 예장을 막론하고 전체 개신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에서 어떤 쪽이든 일제에 충성하고 협력했던 목사들을 아무런 문책이나 철저한 회개없이 그냥 교계의 지도자들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사참배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고신측을 비롯한 보수주의적인 장로교회에서도 광복 후 새롭게 조성된 총회들에서 대부분의 친일파 목사들을 그냥 형식적으로 문서상으로만 질책하고 다 받아주었습니다. 이는 나치 치하에서 나치에 협력한 어용교회와 목사들을 종전 후 모두 축출한 독일교회의 상황에 비하면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독일 신부들이 '히틀러 경례'를 하는 모습


 


역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저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현실의 상황에서 자기의 안위를 지키고자 변절했던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상황에서도 같은 길을 선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속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의 분열을 일삼았던 주된 사람들은 바로 이 친일출신 목사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한국교회가 친일파 목사들만 확실하게 정리했어도 교회의 분열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서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던 한경직 목사의 경우도 이 친일부분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도 결국 나중에 이 부분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회개했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그러한 전력이 있었던 그였기에 군사정권당시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고 두둔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경직 목사의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닌 당시 거의 대부분의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깨끗하게 살았다고 평가받는 한경직 목사의 경우가 이랬다면 나머지는 어땠을까요? 이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특히 더욱 제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광복 이후 일제치하의 종교시설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종교시설부지와 재산들이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기독교쪽으로 환수되었다는 사실입니다.(여기에는 민족종교시설도 상당 수 포함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비호를 받았던 교회 목사들이 상당 수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일제에 협력했던 목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는 커녕 일제에 협력했던 기회주의적 신앙을 가졌던 이들이 고스란히 한국교회의 지도자들로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한국교회가 사회정의와 도덕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부재와 도덕적 해이가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심화되었다고 파악합니다.


 


오늘날 개신교회들이 교회 바깥의 상황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 것은 이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일제-광복-분단-전쟁을 거치면서 과거의 잘못들이 전혀 청산되지 못한 것이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분열에 정말 많은 부분 작용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 신학적 차이로 인한 분열


 


제가 앞에서 한국 선교역사에서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미국교회의 주류신학은 복음주의적 근본주의였습니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문제는 한국교회에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미국북장로교와 남장로교의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성경해석관만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입니다.


 


정통을 강조하고 오리지널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통념상 유학이 그러했듯이 신학 역시 선교 초창기에 자리잡은 이 근본주의적 성경관만이 참되고 바른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 한국교회 초기부터 강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이 역시 장단점이 있겠지만 문제는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다양한 견해 속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짧은 성장기동안 이러한 토론과 융화의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쪽의 의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당연하게도 한국교회에서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성경해석관이 주류이자 유일한 해석관이 되었습니다. 반면 감리교회는 이 부분에서 상당히 유연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들이 신학적인 부분에서 그리 강하게 나오지 않아서 신학적인 면에서 다양한 입장들을 취할 수 있었고(이때 유명한 감리교 신학기관이 협성신학교입니다) 오늘날까지 감리교회는 신학적인 면에서 장로교회보다도 더 다양하고 유연한 성경해석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오늘날도 감리교 신학대학쪽에서는 장로교 신학대학들보다 훨씬 스펙트럼이 넓은 신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이 더 좋으냐라기 보다는 왜 장로교회들이 대개 다른 쪽 입장을 듣지 않는 편협성을 띠게 되고 감리교회는 유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제시하는 것이니 다른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때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 두 명 있습니다. 많은 중요한 이 당시의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지면상, 그리고 내용의 흐름상 반드시 언급해야 될 사람은 장로교의 보수적 신학의 기틀을 마련한 박형룡 목사와 자유주의적 신학의 기틀을 놓은 김재준 목사입니다.


 


양측의 공과 사는 다 제쳐 놓고 제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박형룡 목사는 한국 신학의 정신을 지킨 정의의 화신으로, 김재준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한국교회를 물들인 악마의 화신 비스무레하게 평가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매우 우려스럽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장로교 내부의 문제이긴 합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장로교가 한국교계를 지배하는 주류교파라는 점에서 이 두사람에 대한 견해차는 결국 한국교회의 주류적인 신학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평양신학교


 


역시 모든 세부적 과정은 다 생략하고 평양신학교의 보수적 전통의 흐름을 이은 박형룡 목사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가 한국개신교의 주류를 이루는 신학적 프레임이 되도록 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한국의 주류적 보수교단들의 일반적인 입장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는 헤게모니 싸움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어 보수교단으로부터 자유주의자라는 낙인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김재준 목사의 신학적 견해는 오늘날 완전히 새롭게 조명될 정도로 의미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정치적인 싸움에서 그렇게 결론이 나버렸지만 저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교회들이 그때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수구꼴통이라는 말은 듣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기장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김재준 목사가 파면된 후였습니다. 그래서 기장은 예장과는 전혀 다른 신학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른쪽이 김재준 목사


 


여담입니다만 오늘날 가장 큰 교회의 연합단체는 한기총과 KNCC(기독교 교회 협의회)입니다. 뉴라이트 같은 곳은 종교단체가 아니라 사이비 어용정치단체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의 색깔과 KNCC의 색깔은 사뭇 다릅니다. 왜냐하면 한기총은 예장을 비롯한 보수적 교단이 주류이고 KNCC는 기장과 통합이라는 진보적 교단이 주류이기 때문입니다.(물론 그 외에도 많은 교단들이 소속되어 있습니다만 가장 세가 크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기총은 정부, 특히 한나라당에 매우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하고 있고 KNCC는 지난번 사학법 개정안 문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편입니다. 이는 모두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에 따른 분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신자분들은 한기총이고 KNCC고 다 그나물의 그밥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들어다보면 그 흐름과 방향성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관스님을 예방하고 있는 KNCC 대표단


 


이러다보니 예를 들어 기장같은 경우는 김재준 목사 이후로 한국교회의 토착화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그래서 기장쪽의 신학은 예장과는 매우 다른 한국적 신학을 많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좋고 나쁨을 떠나 교파의 큰 흐름과 성격을 결정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장보다는 예장쪽이 훨씬 많습니다. 예장 산하의 대형교단인 합동과 통합만해도 우리나라 교회의 거의 1/3을 차지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러다 보니 비주류 혹은 소수의 교단들은 그리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장로교회쪽과는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발휘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 쪽은 단일교세로는 세계최고라 할 수 있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정도입니다. 물론 여기도 매우 보수적인 곳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개신교회 메이저 방송이라 할 수 있는 CTS, CBS 들은 명목상으로는 초교파 단체이지만 실제로는 보수적 교회들의 입김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는 곳입니다. 방송을 가만히 보시면 알겠지만 주로 중계하거나 설교하는 목사들의 면면을 보시면 금방 대충 이동네 성격이 어떤 곳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신학적 이슈가 WCC, 즉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교단별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장 안에서도 합동과 통합이 갈라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세계교회 통합에 대한 부분에서 훗날 합동측으로 갈라서게 된 교회들은 WCC가 비성경적 요소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통합측으로 나가게 된 교회들은 대승적 차원에서의 교회일치를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따지고보면 신학적 다양성을 상실한 한국교회의 필연적인 분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일제청산 문제와 광복 이후의 신학적 논쟁은 개신교 내에서 소위 좌파와 우파가 갈라지게 된 핵심적 이슈였습니다. 주류는 보수적인 우파였고 비주류는 진보적인 좌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주류개신교가 우파적 성향을 띠고 비주류개신교회는 좌파적 성향을 띠는 근본적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3. 그 외의 원인


 


제가 그 외의 원인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위의 두가지의 문제는 한국개신교의 분열에 매우 중대한 흐름이었지만 나머지 이유들, 특히 1960년대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일어난 한국개신교회의 교단분열 문제는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만큼 별 대단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가장 큰 원인은 총회 내의 헤게모니 싸움입니다. 즉, 니가 대빵이면 나도 대빵이다. 뭐 이런 것이죠.


 


말씀드리기 창피합니다만 예장 쪽 교단만 해도 제가 알기론 50여곳입니다. 이 많은 교단들 가운데는 독노회처럼(우리나라 최초의 노회입니다) 나름대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도 있지만 상당수가 196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즉 한국개신교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에 별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솔직히 합동이나 합동정통이나 합동보수나 보수정통이나 신자들이든 비신자들이 보기에 무에 다를게 있겠습니까? 다 그나물에 그밥이지요. 이러한 교단의 분열은 대개 총회 내에서 기득권싸움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고 싶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목사들이 회개할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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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만 하더라도 한 호흡에 읽기에는 많은 분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기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처음에 말씀드린 6.25 전쟁 이후로부터 1960년대의 한국경제의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시작된 한국교회의 우경화 부분은 오늘 글에 언급된 한국 개신교의 우파적 경향이 심화되고 격화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은 오늘 다 쓰려고 했는데 이 부분도 오늘 글만큼 길것 같고 또 무엇보다도 제가 힘듭니다...-_-a 그냥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내용은 사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_-;;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만 한국개신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알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특히 다음 글까지 보시게 된다면 어떤 교단이나 교파가 자신과 좀 맞을지 교회를 찾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바램도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지면상의 이유로 장로교와 감리교를 제외한 다른 교파들은 거의 언급하지 못했다는 것인데요, 다른 기회가 있다면 블로그 등을 통해서라도 보충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래 쓰려고 했던 주제가 한국 개신교, 그것도 주도적인 지분을 가지고 있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왜 현재의 주류 개신교가 이러한 성향을 띠게 되었는가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아무래도 다른 교파들은 상대적으로 소흘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한국교회사를 다 다룰 생각 없었다니까요....


 


그럼 다음 시간에는 [주류 개신교의 우경화 과정]이라는 주제로 찾아 뵙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한국개신교의 주류입장이 반공 이데올로기와 보수적 시각을 갖고 자본주의에 대해 대단히 관대해지게 된 원인 등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왜 좀 규모있고 이름좀 알려진 목사라면 거의 대부분 빨갱이 쳐부수자 뭐 이딴 말을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다음 글 가운데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유독 개신교회들이 물질만능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고 현실에 대해서는 무신경해졌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재미없는 글을 혹시라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는 머리숙여 고마움을 표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